도시공간 디자인랩 비들

PLAYCITY
공간을 장소로 만드는 도시 시설물

도만사 매거진 episode 5, 2024.01



가정의달을 맞이해 도만사에 설치된 ‘플레이시티Playcity’는 어린이들이 불규칙하게 연결된 큐브 사이를 기어가고 넘어가고 뛰어가며 놀이를 상상하는 동시에 실험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비정형적인 구조는 ‘플레이시티’가 어린이를 위한 놀이 공간뿐 아니라 테이블, 평상, 벤치, 선반 등으로 분하여 다양한 시민들이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기능하게 하였다. 나아가 도만사의 미닫이문을 뜯어내고 내외부 경계에 설치된 ‘플레이시티’는 도시 공간을 내부로 연장하며 도시 시설물이 되고자 했고, 그 이면에는 도시 시설물의 한 예시로 열린 공간의 가능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오늘날 길을 포함한 대부분의 도시 공간은 워터파크의 유수풀처럼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고 쉼 없이 나아가야만 하는 수중 공간 같다. 유수풀에서 잠시 휴식이라도 취하려면 물의 흐름에 저항해 수영장 가장자리를 꼭 붙잡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길 위에서 멈추려면 흐름에 저항하거나 가장자리와 같은 장치가 필요하다. 또 다른 공통점은 이 멈춤이 둘 다 임시적이라는 것이다. 멈춤 자체가 그 공간의 주된 목적이 아니다. 멈춤이, 그래서 그 공간을 점유하는 것이 흐름을 끊지 않는 자연스러운 행위가 될 수는 없을까? 도시 공간이 통행로 이상의 복합적 공간으로 사용될 수 없을까?

프랑스 창작단체 꺄바농 벡띠꺌Cabanon Vertical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때 도시 중심에 쉼표와 같은 공간을 만드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이 있다. 식물과 다양한 크기의 벤치를 조합한 임시 시설물이었는데, 시민들의 반응이 좋아 시 소속 공공미술품으로 등록되어 영구히 그 자리에 남게 되었다. 시설물이 들어서기 전까지 그곳은 종종 찾아오는 신문 판매자, 솜사탕 가판대, 걸인, 걸려 온 전화를 받으러 구석으로 피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유수풀의 물이 흐르듯 쉴 새 없이 이동하는 공간이었다. 길에 맞닿은 건물에 들어선 카페테라스가 유일하게 앉아 쉴 수 있는 곳이었지만 그곳은 시민이 아닌 소비자를 위한 공간이었다. 길모퉁이에 있어 ‘스트릿 코너Street Corner’라 이름 붙은 이 시설물은 미술품으로 등록된 사실이 알려주듯 전형적인 휴게 시설물과는 다른 형태와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곳의 환경에 어울리는 조형적 요소를 가미한 유일무이한 디자인은 실용적 기능에 심미적 기능을 더해 시설물을 조형물로 거듭나게 하였다. 그래서 ‘스트릿 코너’는 그 외관으로 도시 공간의 풍경을 바꾸고, 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행태로 또 한 번 풍경을 바꾸며 고유의 풍경과 쓰임을 가진 장소를 만들었다.

이처럼 단순 통행로에 지나지 않은 도시 공간이 복합적 공간으로, 나아가 장소로 역할하기 위해서 시설물의 역할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도시 시설물은 별도의 설명이나 홍보가 없어도 사람들의 흥미를 끌고 환경에 적합한 쓰임을 자연스럽게 유도할 수 있어야 한다. 매번 사람들을 붙잡고 이곳에서 쉬어가세요, 책을 읽으세요, 피크닉을 즐기세요, 권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것이 여타 디자인과 비교했을 때 도시 시설물 디자인이 가지는 특징이 아닐까 싶다. 도시 시설물은 불특정다수에게 365일 24시간 노출되어 오로지 그 외형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고 견뎌야 한다. 설명서도, 광고도, 상주하는 관리자도 없는 정면 승부다.

프랑스 철학자 조엘 자스크Zoël Zask는 공공장소에 설치되는 작업의 어려움을 두고 두 가지 개념을 연결하여 설명한다. 바로 ‘정의(Justice)’ 와 ‘올바름(Justesse)’이다. 그녀가 언급한 작업의 어려움은 맥락과 환경과의 조화, 사용자들의 요구, 설치 후 대중들의 사용 등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올바르게 작업해야 하고, 이를 통해 공공을 만족시키는 사회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 자스크는 이어서 정의와 올바름을 구현해 내는 꺄바농 벡띠꺌의 작업을 미국 예술가 칼 앙드레Carl André의 ‘장소로서의 조형물(Sculpture as Place)’ 에 빗대어 소개한다. 조형물과 주변 환경의 관계성에 집중하는 이 개념은 심미성과 실용성을 갖춘 조형시설물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며 도시 공간을 장소로 만드는 시설물이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조형물과 주변 환경의 관계성은 환경을 만드는 조형물이자 환경에 녹아드는 조형물로, 즉 상호작용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여기서 조형물과 환경은 대등한 위치에서 공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형물을 도시 시설물로 바꾸어 보자. 도시 시설물과 환경은 상호작용하는 관계로, 대등한 위치에서 공존할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가 환경을 사람으로 바꾸어 보자. 도시 시설물과 사람은 상호작용하는 관계로, 대등한 위치에서 공존할 수 있다. 그러니까 도시 공간을 장소로 바꾸기 위해 사람을 포함한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공존하는 도시 시설물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플레이시티’는 자신의 쓰임을 주변 환경과 사용자에게 강요하기보다는 그 열린 형태와 기능을 통해 이들의 자유로운 개입을 가능하게 하였고, 고유의 풍경과 쓰임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 공간은 전시 기간동안 장소로 역할 할 수 있었다. 어린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장소, 잠시 앉아 골목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장소, 여럿이 모여 수다를 떨 수 있는 장소. 무엇보다 놀이라는 주제로 시작한 공간이기에 더욱 자유롭고 편안한 장소가 될 수 있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상상하며 ‘플레이시티’를 디자인할 때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이 복잡한 규칙이나 승패, 제한이 없는 놀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실용성과 심미성을 갖춘 시설물, 올바름과 정의를 구현하는 시설물 같은 단어는 어쩌면 거추장스러운 설명일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건 놀이를 하듯 재미있게 사용할 수 있는 시설물이 재미있는 공간을 만들고, 그러면 흐르는 물처럼 쉼없이 흘러가던 사람들이 자연스레 멈추어서 장소를 만들지 않을까? 도시 공간이 한 방향으로 흐르는 유수풀이 아니라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가 될 수 있지 않을까?